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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목사와 이태영 초대총장의 삶

기사승인 2016.05.10  14: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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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식 목사 --- 독립운동가, 신앙인, 장애인 교육과 사회복지에 평생을 바치다

개교 60주년을 맞아 우리대학의 시초인 두 인물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우리대학의 전신인 ‘대구맹아학교’를 창학하고 대구대학교를 설립한 이영식 목사, 초대총장인 이태영 총장. 그들이 어떻게 총장이 되었으며,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살펴봤다.                              

독립운동가, 신앙인, 장애인 교육과 사회복지에 평생을 바친 이영식 목사(1894~1981)

설립자 이영식 목사(1894~1981)


1894년 경북 성주군에서 출생한 이영식 목사는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계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열정적으로 학업과 계몽활동, 선교활동 등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갔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1919년 3월에 3.1독립운동에 가담한 죄목으로 서울과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겪었다. 1922년 출옥한 후, 1923년 일본 고오베신학교에 유학하였고, 1927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대구 애락원 나환자 교회에서 목사에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후 그는 새로운 사회봉사사업으로 국가 사회에 기여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대구에 맹·농아인을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몇 몇 사람과 뜻을 함께해서 ‘맹아 학교’ 설립을 구상했다. 그 당시에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심했고, 사회복지시설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기에 이러한 구상 자체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미 그가 몸담고 있었던 기독교계와 대구지역사회의 협조를 받아 1946년 4월 19일 기성회 창립총회를 통해 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지속적인 재정적 문제와 더불어 한국전쟁 발발 등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다 1954년 12월 11일 드디어 교사와 기숙사가 겸비된 본관 건물이 완성되어 특수학교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장애인도 존엄한 인격체이며, 당당한 사회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은 이영식 목사의 투지와 집념이 이뤄낸 쾌거였다.
1961년 4월 8일에는 ‘한국사회사업대학’이라는 이름으로 4년제 정규대학이 되었다. 대명동에 처음 뿌리를 내리고 있던 한국사회사헙대학이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영식 초대총장은 1971년에 경산시 진량면 내리10만평 중 약 5만평을 구입해 제2 캠퍼스 시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78년부터 경산에 단과대학 건물이 세워져 이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81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한사대학교’에서 ‘대구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한다.
이영식 목사의 아들인 이태영 박사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대구대학교의 첫 총장이 되었다. 이영식 목사는 한국 장애인 교육과 사회복지 사업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대구대학교를 특수교육의 요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딱히 지병 없는 건강한 삶을 살다가 1981년 12월 8일 미국령 괌(Guam)에서 생을 마쳤다.
1919.   3.   1.  독립운동으로 복역
1927.   4.       대구 서문교회 목사 시무
1946.   4.       대구 맹아학원 설립. 원장 취임
1956.   6.       한국사회사업대학 설립, 초대 학장 취임
1969.   5. 16. 민족상 교육부문 본문 수상
1977. 11.       해외 희생동포 위령 사업회 고문

父 이영식 목사의 뜻을 이어 우리대학 초석을 다진 이태영 초대총장(1929~1995)

이태영 초대총장(1929~1995)


일본에서 공학도로 유학중이던 이태영 초대총장은 1955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맹인복지대회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한국대표로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공학도로서의 꿈을 접고 장애인교육과 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후에 ‘대구대학교’설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장애인 교육도 시급하지만 이 교육을 담당할 지도자 양성이 매우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 때 당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아무래도 대학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사업을 해서 맹아학교를 유지 경영하겠다는 생각은 제가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고학할 때 과일 장사를 했는데 도저히 안돼요. 그 이래로 나는 경제수익을 위한 그런 사업은 절대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장애인교육과 복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론개발, 지도자 양성, 연구 이런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가 앞으로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이게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해서 대학을 세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1985년 9월 12일 이태영 초대총장 회고담).” 이렇게 해서 대구대학교의 전신인 한국이공학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학원이 운영되던 중, 1957년에는 대학설립의 준비 성격을 지니는 학교로서 ‘한국사회사업학교’의 인가를 얻게 된다. 우리대학은 이 당시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61년 ‘한국사회사업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본래 한국이공학원에서는 맹아들의 졸업 후 진로를 위해 이공계열 학과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대학으로의 승격 과정에서 과감하게 본래의 건학 정신을 본격적으로 구현할 목적으로 사회사업학과, 특수교육과 2개 학과를 앞세워 행정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특수교육 불모지였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 비춰볼 때 파격적인 행보이면서도,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는 평가가 있다. 결국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오천석 박사의 이해 끝에 입학정원 20명 단설학과인 특수교육과 만으로 정규 4년제 대학의 인가를 얻었다.
후에 이태영 초대총장은 “이걸 가지고 인가해 주는 문교부나 인가 받은 우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라고 회고했다. 이렇게 해서 1961년 ‘특수교육과’가 단설학과로서는 우리나라 대학 중 최초로 설치되었다. 6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제일주의 원칙에 따라 교육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대학은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교육과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복지분야의 전문가 양성과 그 연구개발에 중심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 분야의 특성화 대학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에서 정치변동이나 교육정책의 고비마다 지방의 약소대학으로서의 위기와 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역경마다 당시 이태영 학장의 탁월한 리더십과 관용성이 난관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지방대학 육성정책에 힘입어 엄청난 속도로 양적성장을 이룬 우리대학은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이듬해 한사대학교에서 대구대학교로 교명도 바꿔졌다. 교명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당시 이태영 초대총장은 대학의 교명을 ‘대구대학교’로 하고 싶었지만, 지역사회 여론 대다수가 반대쪽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대구대학교’의 대구를 ‘대구(大丘)’로 표기해서 올렸는데, 당시 영어영문학과에 재직 중이던 권오택 교수는 대구공고 출신으로 고교시절에 전두환 대통령과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결국 청와대 대통령의 결재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대구(大邱)’로 바로잡아 재가해준 결과 누구도 토를 달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태영 총장은 대구대학교 초대총장으로 1982년 3월 4일 정식 취임했다. 이때 학원창설 36주년 대학 개교 26주년을 맞는 해였다.
그렇게 우리대학 경영 중에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고 전국 대학가에는 한 차례 거센 민주화의 바람이 몰아치게 된다. 평소 지나치게 업무가 과중되어 오던 중이었기 때문에 결국 1988년 봄에는 병원에 장기입원하게 되었고, 병세가 더욱 심해져 그 해 가을에는 미국으로 치료를 위해 출국해야 했다. 이때 이태영 총장의 나이는 만 59세로 한창 능숙하게 집무를 수행할 수 있는 때였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7년간 미국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중 1995년 11월 29일 운명하고 말았다.

김상훈 기자 dlefull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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